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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제3강 예수회의 중국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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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

 

중국에 진출한 유럽 출신 그리스도교 선교사들

 

1) 유럽의 정치 상황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대

서기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후 서로마 제국은 차츰 정치적 힘을 잃어갔다. 375년 동게르만의 고트족()이 아시아에서 침입해 온 훈족의 압박을 받아 이동을 개시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전개되어, 게르만 왕국이 각지에 세워졌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 남프랑스 론강 유역의 부르군트 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 왕국, 영국의 앵글로 색슨 왕국 등이다. 원주지인 발트해()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도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세 왕국을 세웠다. 북게르만의 일부는 8세기부터 노르만인()으로서 유럽 각지를 침략하여 또 한 차례의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2) 중국과 선교사들의 첫 만남

자신들이 사는 땅을 세계의 중심(中國)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인들은 유럽과 주변 대륙의 종교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포르투갈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마카오에 정착한 16세기 이후에도 중국인들은 그들을 불교의 한 종파를 믿는 불교도들로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왔던 16~17세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마태오 리치 신부도 중국에서 선교하던 초기에는 승복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최초로 유교를 발견한 유럽인들로 알려졌고, 유교를 최초로 유럽인들에게 해석하여 전달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예수회가 진출하기 훨씬 전에 다른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했던 아래와 같은 기록들도 있다.

 

- 네스토리우스(?~451) 추종자들이 7~8세기에 중국에 진출해 활동했었다. 그들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단성론에 물들어 있던 이들로서 중국에서는 이들이 전한 진리를 경교(景敎)라 불렀다.

- 13세기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원나라에 왔고, 선교회에서 몬테코르비노 요한 주교(1247~1328)를 파견했다. 그는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약 6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원나라를 여행하고 여행기를 저술하여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3) 유교의 기원과 종교관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체계화한 사상을 계승한 종교이다. 공자는 인과 덕에 의해 천명에 따르는 이상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에 녹아 있다. 공자의 사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지만 주로 국가 운영 원리로서의 유학이었다. 종교적 체계를 갖추는 것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서였다. 문묘를 세우고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민간에서도 유교 사상에 따른 제사 풍습 등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경우 주자학 일변도로 치달았다는 지적이 있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敬天思想)에서 볼 수 있다. 은주시대에 걸쳐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시경· 서경을 비롯한 오경 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절대 신에 대한 숭경(崇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상제는 인간을 감찰하고 화복을 내려주는 무한한 권위를 지닌 절대 타자로서 인식되었다.

상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였다. 공자는 천인관계(天人關係)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파악하였다. 공자는 초월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 행사이지만 유교의 제의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교의 제의는 주술적 요구를 배격하고 세속 세계를 도덕화하려고 한다.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다.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4) 성리학과 조선 사회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종교로서 사회의 모든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으로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공동체 질서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동시에 특정 학파가 지배적인 권력을 획득하면서 당쟁을 심화시키고, 현실 정치와 경제 발전을 저해하며, 백성의 삶보다는 명분이나 예법에 집착하게 만드는 등 조선 사회를 경직시키고 몰락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포르투갈의 신대륙 진출과 교황청의 선교사 보호 제도

유럽인들이 신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에로의 진출이 있었던 15세기 중엽부터, 스페인포르투갈은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때 주로 두 항로가 이용되었는데,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경유, 말라카해협을 지나 싱가포르, 마카오, 일본 등지로 향하는 동방 항로를 이용했고, 스페인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멕시코ㆍ남미 등을 경유,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향하는 서방 항로를 이용했다. 이들 선박에는 새로 발견되는 지역으로 건너가는 선교사들도 동승하고 있었다.

로마교황청보교권’(保敎權, Padroado) 제도를 설정하여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후원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포르투갈은 1533년 인도 고아(Goa)에 교구를 설립하고, 동아시아 지역의 교무를 통할하였다. 고아 교구는 이후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복음 선포를 위한 선교사들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고, 각 지역 교구 분할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 보호권 분할 설정(토르데시야스 조약, Tratado de Tordesillas)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쟁은 1494년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인해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교황은 대서양의 남북 경계선을 설정하여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더 이상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 다시 경쟁하게 되었다.

 

2. 예수회의 창립과 아시아 선교

 

예수회(Society of Jesus, 약칭 S.J.)의 창립 과정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혼란과 가톨릭교회의 쇄신 운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흐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배경

16세기 초, 루터의 종교 변혁(1517) 이후 유럽 전역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내부 개혁과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신앙 운동이 필요했다. 예수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한 새로운 수도 공동체였다.

 

2) 창립 인물

이냐시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

원래 스페인의 기사였으나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다친 후 치료 과정 중 회심하게 되었다. 투병하는 동안 예수님의 생애와 성인 전을 읽으며 깊은 내적 변화를 경험하고 하느님을 위한 봉사를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후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을 정리하여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3) 동료들의 결집 (1534)

이냐시오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뜻을 같이한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피에르 파브르, 디에고 라이네즈, 알폰소 살메론, 니콜라스 보바딜라, 시몬 로드리게스 등이었다.

1534815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작은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서원을 하고, 필요하다면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교도에게 선교하겠다고 서원하였다.

후일 이를 예수회의 첫 서원’”이라 불렀다.

 

4) 예수회의 인가 (1540)

성지 순례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로마에 진출하여 교황에게 봉사하기로 하고, 1539년 동료들과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여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인가를 청하였다. 1540927,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황 칙서(Regimini militantis Ecclesiae)를 통해 공식적으로 예수회의 설립을 승인하였다. 이 수도회의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다.

 

5) 예수회의 특징

예수회 회원들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틴어로 Ad maiorem Dei gloriam)라는 표어 아래 활동하였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파견되어 선교, 교육, 사회봉사에 헌신하였다.

영신 수련을 통한 내적 쇄신과 실천을 강조하고, 교황에 대한 특별 순명 서원을 추가하여, 교황이 파견하는 곳은 어디든 간다는 정신을 지님이 특징이었다.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 직후부터 전 세계 선교에 뛰어들었다. 그 예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 일본, 중국 광동 입구까지 갔고, 다른 동료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향했다. 유럽에서는 교육기관(College)을 설립해 지성적·영적 양성을 통해 가톨릭 개혁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들은 전 세계로 파견되어 가톨릭 쇄신과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6) 예수회 선교사의 아시아 선교활동과 적응 주의

예수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15425월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고, 1545년엔 세일론(=스리랑카), 말레이반도의 말라카(Malacca), 몰루카스(Moluccas) 제도에서 선교하였다. 1547년 그는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ヤジロウ 또는 アンジロ)를 만나 일본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고, 고아로 함께 귀환하여 일본으로의 선교 여행을 준비하면서 야지로와 두 하인에게 교리를 가르쳐 15489월에 세례를 베풀었다. 15498,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야지로(바오로)와 두 하인, 그리고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수사와 함께 일본 남부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 일본에 첫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히라토(平戶), 야마구치(山口), 교토(京都), 붕고(豊後) 등지에서 23개월간 선교하였으며, 그 후 선교 업무 협조와 선교사 요청을 위해 1551년 일본을 떠나 1552년 초에 고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으로 다시 가지 못하고 15524월 중국 선교를 위해 출발, 8월 하순에 중국의 남단인 광동 인근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하여 중국 내지(內地) 입국을 준비하던 중 열병에 걸려 123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2년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인도인 개종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남부 지방의 언어인 타밀(Tamil)어로 된 교리 문답서를 만들고 해안에 사는 가난한 어부들과 낮은 계층에게 봉사하면서 선교의 효과를 거두었다. 남부 한 지역에서는 한 달 동안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정도였다. 예수회는 하비에르의 교리서를 인도에서 최초로 인쇄하였고(1557), 타밀어로 교리서(1579)를 번역 간행하였다.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원 로베르트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1605년 인도 동남쪽 피셔리(Fischery) 해안 마드라스(Madras)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크리스찬 브라만’(Christian Brahman)으로 처신한 데 노빌리 신부는 타밀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대화하면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인도 상류 사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현지 적응주의 선교 방법은 고아와 로마에 고발되어 인도에서의 의례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17031704년에 퐁디셰리에 있던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들이 데 노빌리 신부와 동료 예수회 회원들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에 대해 교황 대사 투르농(Maillard de Tournon, 16681710)에게 고발하였고, 교황 대사는 자세한 조사도 없이 16개 항목의 제한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의례 논쟁이 시작되었다. 1742년에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게 되자 이곳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회원들은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더 이상 법률상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예수회 회원들 127명은 리스본(Lisbon)으로 철수하였고, 프랑스령 인도에서 선교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들도 선교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가 없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인도의 상류층에 진출하지 못하고 비 힌두교인들과 최 하층민들에게만 수용됨으로써 여전히 이국적인 종교로 남게 되었다.

 

7) 마태오 리치의 중국 선교와 의례 논쟁

중국 본토의 선교는 15839월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후 50여 년 만인 1601년에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수도 북경에 처음으로 진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리치 신부는 특별히 과학 선교, 학술 선교, 저작 선교 등을 통해 보유론적 입장을 택함으로써 수도 북경에서 선교할 수 있었다. 이후 중국교회는 만주, 조선, 안남 등지의 신앙 전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1567년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마카오에 거점을 설치한 이후, 1576년에는 마카오 교구가 설립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도교유교불교가 전통적으로 자리 잡은 중국 사회에 그리스도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중국 고전을 연구하며 적응주의 노선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81606) 신부, 루지에리(Michel Ruggieri, 15431607) 신부,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신부 등은 중국 고전을 연구하고 자연 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서양 지식을 바탕으로 일반인들보다는 사대부를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그 결과 리치 신부는 1601년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 15731619)에게 호감을 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의 신앙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조선 천주교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적응주의 선교활동의 결과 1614년에는 중국의 9개 지방에 15만 명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탄생했고, 1617년에는 2만여 명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회 간의 갈등과 알력 및 견해 차이로 중국 선교를 크게 후퇴시키게 된 것이다. 즉 뒤늦게 중국에 온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예수회원들의 적응주의적 선교를 불법적인 것으로 보고 교황청에 고발하면서 의례 논쟁이 야기되었다. 이것은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포르투갈과 스페인, 포교성의 투르농과 중국의 강희제(康熙帝, 16621722)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다. 강희제17001130일에 공자와 조상 숭배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시민 예식이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1742교황 베네딕토 14(17401758)에 의해 예수회의 적응주의적인 선교는 단죄를 받았다. 그 결과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층의 개종과 입교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신자들도 배교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또 그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유교적인 전통이 있는 국가들에 큰 종교적인 시련을 가져왔으며, 동북아시아의 선교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줬다.

1831북경 대목구가 선교 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 遣使會)에 맡겨지고 같은 해에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는데,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사목 관할권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이런 결정은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포교성 파견 선교사들 간의 논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포르투갈 보교권과 포교성 파견 선교회 간의 갈등은 1857년 포르투갈 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정교 협약을 통해 조정되었고, 이후 포르투갈의 보교권은 중국 본토에서는 광동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도 1847년 포르투갈의 영토인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함으로써 조선 교회를 담당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보호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8) 중국과 조선 두 교회의 연계성

중국으로부터 조선으로의 종교 및 문화의 유입, 특별히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들과 한역 과학서나 한역 서학서들이 북경을 오간 사신들의 손을 거쳐 조선에 유입되고, 18세기 말 종교로서의 만남보다는 학문으로서의 만남을 통해 서학에 눈뜨게 된 일부 학자들이 사신들의 틈에 끼어 북경의 천주당을 방문하고,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1784년 초,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베풀어진 이승훈의 세례, 1836년 조선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유학생이었던 김대건최양업최방제 등 세 신학생이 마카오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된 것, 북만주 선교의 거점이었던 장춘 인근 조바자츠(小八家子)에서 184412월에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은 것, 최양업 부제가 18494월에 사제로 서품된 후 조선 입국을 기다리며 그해 5월부터 123일까지 약 7개월 동안 요동 반도의 양콴(陽關)과 차커우(岔溝) 지역에서 보좌신부로 사목 활동을 한 것, 최 신부가 활동하던 그 지역을 1869년부터, 요동 대목구장 베롤(E. François Verrolles, 1878) 주교가 조선 교회의 재치권 지역으로 할양하여 주고, 그곳에 조선교구 대표부를 설치하여 줌으로써 조선에 파견되어 오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중간 거점이 되도록 배려해 준 것 등은 모두 중국교회와 조선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에 의해서만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3. 의례 논쟁에 관한 교황청의 결정

 

1) 수도회 간의 제사에 관한 견해 차이

예수회원들은 제사를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습(의 표현)”으로 보았다. 조상 제사나 공자 제사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효도와 존경의 표시.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하지 않으며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제사를 종교적 성격이 강한 우상 숭배로 간주하였다. 제사에는 제물(, 음식, 제단)이 사용되며, 이는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 행위와 유사.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리에 어긋나므로 신자들이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중국 문화와의 절충을 거부하고 로마교황청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2) 교황청의 제사에 관한 결정

초기에 교황청은 예수회의 현지 적응 주의를 일정 부분 묵인하였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18세기 초,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우상 숭배 주장을 받아들여, 교황 클레멘스 11(1704, 1715 칙령)와 베네딕토 14(1742) 등이 제사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중국 황제 강희제, 옹정제 등은 교황청의 결정을 외국이 중국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 선교사 활동을 크게 제한하고 선교사들의 추방을 강행하였다.

의례 논쟁에 관한 교황청의 태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황 인노첸시오 10: 1645년 적응 주의를 금지했고,

교황 알렉산델 7 : 1656년 적응 주의 금지를 완화하였다.

1692康熙帝의 관용령 반포 1년 후 적응 주의는 다시금 로마로부터 단죄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111704년 그것을 다시 금지했다.

1707교황 특사 투르논중국 파견돼 강희제에게 불경한 행동을 해 황제와 결별 초래했다. 투르논은 1710년 중국에서 구류 생활 중 사망했다. 그로 인해 황제는 예수회원들의 적응 주의와 다른 의견의 신앙설교를 금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3: 1723년 적응 주의를 다시 완화 인정한 다음,

교황 베네딕토 141742년 모든 적응 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금지령을 반포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중국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크게 약화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교황 비오 11(1939)비오 12(1940)중국 의례의 금지령을 철회하였으나 최초의 중국인 田耕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1946)된 지 3년 후인 1949년 모택동의 공산군이 중국 땅으로 전진하였다. 새로운 박해가 어린 교회를 파괴하였고, 20개 대교구, 79개의 교구, 38개의 知牧區로써 설정된 교계제도가 전멸되었다.

 

3) 의례 논쟁과 조선 천주교회

북경교구 교구장 구베아 주교(Alexandre de Gouvea, 1712~1808)는 조상 제사와 공자 제례를 금지하는 칙령을 조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이 결정은 조선 천주교회 초기 형성 과정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에는 직접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 이벽·정약용·정약전 등 지식인들이 서학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특수한 경우였는데, 교회의 지도권이 북경교구에 있었기에, 북경 주교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1)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직접적 영향

충효 문화와의 충돌

조선 사회에서 제사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효와 가문의 근본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의례였다. 구베아 주교의 금지령은 곧 기독교인은 충과 효를 저버린다라는 비난으로 이어져, 사회와의 갈등이 점차 커졌다.

 

신자 내부의 갈등

일부 신자들은 제사를 금지하는 것을 받아들였으나, 다른 이들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았다. 신앙을 지키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혼란이 뒤따랐다.

 

박해의 빌미 제공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신앙은 곧 유교적 사회 질서 부정으로 여겨졌고, “불효하고 패륜적인 종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면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대규모 박해의 핵심 명분이 되었다.

 

(2) 순교자들이 보여 준 신앙의 모범

조선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사회적 통합보다는 대립적 구조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철저한 금지령과 그로 인한 박해를 통해 순교 정신이 강조되었고, 이는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후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조상 제사를 민족적·사회적 예절로 인정하여 허용하기 전까지, 한국 교회는 긴 세월 동안 박해와 갈등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령은 조선 천주교회에 사회적 갈등과 박해를 불러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동시에 신앙 공동체의 순교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충효 중심 사회였던 조선에서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낙인찍힌 핵심 이유가 바로 이 금지령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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