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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제1장 조선 천주교회 초기 상황 : 제1절 서구 문명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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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明) 청(淸) 시기 중국에 전래된 청구문명(淸歐文明) 


  15세기 중엽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원들은 그들의 배로 신대륙을 향해 항해하였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1486년 희망봉에 도달하였고,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에까지 이르렀고, 카브랄은 1500년에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깃발 아래 1519-1522년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1516년 중국에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평화적인 경쟁자로 광동에 정착하였다. 중국 정부는 이들 상인들이 1567년 마카오에 거류지를 설립하도록 허락하였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1543년에 일본으로도 진출하였다. 스페인 선원들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였으니,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 이사벨의 후원 아래 1492년 서인도제도를 탐험하였고, 1520년대를 전후하여 스페인인들은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에 이르렀다. (A. 프란츤,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2001), 371-372쪽 참조.)

  포르투갈 범선들에 동승하여 인도나 중국 등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문화적 적응주의 정책으로 선교를 해 나갔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1601년 중국의 수도 북경에 입경하여, 신앙과 서양 문물을 전해 주었고, 독일 쾰른 출신 예수회원 아담 샬(Adam Schall)* 신부는 1644년 그리스도교 신앙을 중국에 전파하는 것 외에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물질문명을 전해 주었다. 청시기 선교사들에 의해 북경에 전래된 서양의 문명을 청구문명이라 하는데, 조선의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들이 중국에 가게 되면 북경 시내에 설립되어 있던 네 곳의 성당을 방문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곤 하였다. 1720년에는 이이명(李頤命), 1765년에는 홍대용(洪大容), 1780년에는 박지원(朴趾源)이 북경의 천주당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서양의 이색적인 문물과 한역 서학서 등이 이들 사신들을 통해 전래되었다. 당시 조선에 전래된 서양 문물은 지리, 역법, 천문, 수학, 종교에 관한 것으로서 지도, 천리경, 자명종, 화포, 천체 관측기기, 역서, 천주교 서적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중 조선에 최초로 전해진 세계지도는 마태오 리치가 1603(선조 37) 제작한 곤여(坤輿)만국전도이다. 그 외 여(輿)지구(현재의 지구의)도 전래됐다.

  *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는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1571년 예수회에 입회, 1578년 인도에 파견되었고, 1580년 사제품을 받았다. 1582년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1601년에 북경에 입경하였다. 선교할 때 보유론적 입장에서 적응주의 정책을 썼고, 세계지도를 그렸으며, 1595년 천주실의를 집필하였다. 1610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 아담 샬(1591-1666) 신부는 독일 쾰른에서 태어나, 1611년 예수회에 입회, 1618년 사제품을 받고, 1622년에 중국에 입국하였다. 1644년 청나라가 건국되자 흠천감 직책을 맡았고, 1650년 북경의 남당 성당을 지었으며, 1666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2. 일본의 조선 침략과 예수회의 선교 시도


  한편 조선은 청구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도모하던 이 시기에 일본의 침략과 여진족인 청()의 침략 전역[戰役: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두 번씩이나 겪어내야 했다. 1592(임진)년 아시아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8천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을 선봉장으로 삼았다. 고니시는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쉽게 점령하였으며, 가토는 조선의 동북쪽 함경도로 진격로를 택해 북진하였고, 전쟁 초기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한산 대첩과 제해권 장악, 권율의 행주 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과 의병 및 승병들까지 가세한 강력한 저항에 밀려 도요토미나 고니시는 점차 패퇴하게 되었고 조명(朝明) 연합군의 항전으로 결국 일본으로 철군하였고, 가토 역시 남해안으로 후퇴하였다가 1596년 일본으로 철군하였다. 1597(정유)년 고니시와 가토는 재차 조선에 침입(정유재란)하였으나 1598년 도요토미의 사망과 더불어 일본 내정이 불안해지자 철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는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 했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사회가 혼란해졌다.

  한편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는 비록 일본군 가톨릭 신자 장병들을 위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를 곰개성(熊川城 - 현 진해시 웅천1동 와성의 남산성) 지역에 초치해 미사와 종교행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한칸 레온과 함께 15931227일 조선 해안에 도착하였으며, 그 다음날에 웅천성에 이르렀다. 그는 약 1년의 체류 기간 동안 조선의 남해안에 산재해 있던 여러 곳의 일본군 요새를 방문하면서 은밀하게 선교활동을 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삐레스(Francisco Pires) 신부는 1597년에 예수회원 라구나 신부(1552-1617)와 타무라(田村) 로만 수사가 2개월 간 조선에 체류하였다고 그의 편지에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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